TRPG
[레오츠카] 스윙바이 패스파인더
라꾸르트
2020. 2. 7. 20:11
앙툴루 레오츠카 기반으로 <스윙바이 패스파인더> 다녀왔습니다!
W. 헤르츠
KPC 츠키나가 레오 (라꾸)
PC 스오우 츠카사 (오드)
해당 시나리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PC로 플레이하실 분들께는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향유고래가 별들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특유의 거대하고 둥글며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돌연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가진 선체 디자인 덕분에 으레 ‘고래’라고 불리곤 하는 우주 왕복선 테미스 3호.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하며 화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21세기로 접어들고 근 오륙십 년간,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킨 인류의 또다른 걸작이 어엿한 성공 가도에 오른 것입니다.
새로운 임무를 위해 탑승한 츠카사 역시 자랑스러운 테미스 3호의 승무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출항의 목적은 DSGⅡ(화성 국제우주정거장) 물자 보급 및 단기 체류.
승무원들은 이제 3일 후면 화성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는 중입니다.
순조로운 여행이 이어졌습니다.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잠시 잠든 츠카사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꿈을 꾸고 잠에서 깹니다.
지금까진 쭉 내가 너를 기다렸으니까… 이번엔 네가 그래 줬으면 좋겠어.
만나야 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난대, 츠카사…….
비온 뒤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세상에 조용히 되감기는 목소리는 오래전의 경험을 반추합니다.
자신을 시간여행자이자 당신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상하면서도 마음 아린 사건을 겪은 후 한참이 흘렀습니다.
그가 당신 안에서 점점 공간을 좀먹고 다른 상상을 밀어내며 자리 잡는 동안
츠카사는 한 번도 그 시계에 대해 잊어버린 적이 없을 것입니다.
문득 생각은 늘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에 미칩니다.
내부가 망가지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관리해 주곤 했었죠.
떠오른 김에 오랜만에 꺼내어 태엽이라도 감아 줄까요?

조심스럽게 태엽을 감아 준 순간,
시야가 아찔하게 훅 꺼집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될 정도로 눈앞이 깊게 깜빡였었습니다.
이성치 판정 0/1

기준치: | 65/32/13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이성 -1.
다시 눈을 뜬 츠카사는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츠카사가 잠들었던 곳은 우주선 선내 승무원 휴게실.
2층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는 곳이라 주변에 잠든 동료가 꽤 여럿이었는데요.
지금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 아니라는 느낌이 명확히 듭니다.
츠카사는 승무원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도로 나와 둘러보아도 츠카사가 받는 인상은 휴게실 안쪽과 동일합니다.
지나치게 적막하고 고요한 실내.
복도에도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잠깐, 설마 정말 아무도 없겠어요?
긴 원통형 모양인 우주선 특성상, 츠카사가 서 있는 휴게실 밖 복도는 내부 끄트머리입니다.
여기서 여가 공간, 화물실, 연구소를 거쳐 조종실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선 조종석까지 쭉 훑어볼까요?
간단히 각 장소를 들러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만을 확인합시다.

여가 공간입니다.
승무원들이 휴식 시간에 지구에서 가져온 영화를 보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간식을 먹는 등의 일에 주로 쓰던 공간입니다.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식량, 비상 연료, 비상약품 등 다양한 물건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입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우주 항해 중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지구로부터 가져온 임무를 수행하는 업무공간이죠.
보통은 이곳에 사람이 가장 많은데요…….
대체 뭐죠? 여기도 아무도 없습니다!

넓은 조종석입니다.
예전 같으면 사람 두어 명만 겨우 들어갈 공간이었겠지만,
기술이 발전되면서 옛 SF 영화들이 상상하던 대로 거대한 유리창과 수많은 계기판이 반짝이는 기관으로 변한 곳이지요.
그리고 역시… 이곳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자동 운항 설정이 어느 정도 받쳐 준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조종석까지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설마, 지금…
이 큰 테미스 3호에 츠카사 혼자뿐인 건가요?
일단 우주선이 제대로 항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계기 패널이라도 살펴봅시다.

항법 판정

기준치: | 60/30/12 |
굴림: | 3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조종간은 이상할 정도로 힘없이 우쭐거리고,
위치를 표시하는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여러 알림 사항이 떠 있어야 할 각종 스위치나 패널도 지금은 조용합니다.
하다못해 에러 메시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거 위급상황 아닌가요?
지구 측 관제소와 소통이라도 해봐야겠습니다.
조종석엔 당연히 지구 관제소와 통신할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장치 주파수를 조작하면 지직거리는 화이트노이즈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합니다.
쉽게 연결되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
몇 번의 시도 끝에 주파수를 돌리는 버튼이 딱 맞물리는 듯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파작파작 오가던 화이트노이즈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를... 만나러 와요."
어?
그 순간 조종석 전체의 불이 꺼집니다.
동시에 창문 바깥이 번쩍였습니다.
눈이 뜨거울 정도로 환하게 말입니다.
눈꺼풀을 뚫고 아프게 들어오는 빛을 간신히 가리고 몇 초 후,
다시 정상적인 조도가 돌아온 듯합니다.
눈을 떠 보면……
바깥으로부터 주먹만 한 빛 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면 창문 너머에 있던 그것은 놀랍게도 창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심장처럼 팔딱팔딱 맥동하는 움직임으로 츠카사에게까지 다가왔습니다.
창백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일반적 상식과 달리 몹시 차갑고 얼음처럼 어슴푸레한 명도를 지녔습니다.
주변을 잠시 맴돌던 빛 덩어리는 이윽고 츠카사의 시야 근처에 떠서 가만히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들어라.
순간 츠카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언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성이었습니다.
츠카사의 안에서부터, 우주선 바깥에서부터, 지구로부터,
어쩌면 퀘이사 너머의 또 다른 태양에서부터,
온 세상에서,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터진 외침이었습니다.
공중을 징징 울렸고, 그다지 우렁차진 못했지만 놓치기가 불가능할 만큼 명징하였으며,
비통한 슬픔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적막한 환희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불어도 아닌 문장으로 하여금 목소리는 말했습니다.
들어라, 너는 태초의 것이 이끄는 대로 따르라.
저것이 너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이성치 판정 1/1D2

기준치: | 64/32/12 |
굴림: | 1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성 -1.
그리고 그 신의 음성 같은 자연의 으름장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츠카사의 눈앞에서 맥동하던 빛 덩어리가 휙 저편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열 발짝쯤 거리에서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몸을 흔듭니다.

츠카사는 영문을 모른 채 조금 앞서가는 빛 덩어리를 따라 걸음을 옮깁니다.
빛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씩 츠카사를 이끌며 아까 당신이 잠에서 깼던 승무원 주거 공간 쪽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뒤따라 일직선상의 우주선을 걸어가니,
닫아 둔 문을 휙 통과해 먼저 휴게실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들어가 볼까요?

츠카사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츠카사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누가 있네요?
빛 역시 그 침대 주변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다가가니,
아.
당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죠, 오늘도 생각했었으니까요.
창백하고 조용한 살결과 둥근 어깨,
반짝이는 속눈썹은 눈꺼풀 너머의 생명을 가린 채 닫혀 있습니다.
똑바로 누워 잠든 그는 가슴팍을 고르게 오르내리며 작은 짐승과도 같이 호흡합니다.
유리관에 잠긴 공주나 물레에 찔린 소녀인 듯이.
상아처럼 빛나는 살갗, 금관 하나 걸치지 않았으나 도리어 경건해 보이는 그는,
마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서 갓 건져 올린 최초의 인류 같습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여기 있죠?
이때 츠카사를 이끈 빛이 훅 고도를 낮추더니 그의 가슴을 통과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체처럼 싸늘한 레오는 눈을 뜨지 않네요.
만져 보아도 차가운 체온이 손끝에 닿을 뿐입니다.
레오는 말이 없고, 흔들어 본다 한들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럴 때 동화에서는 어떻게 하던가요?

속눈썹의 개수도 셀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입니다.
츠카사는 결심을 마치고 레오에게 약속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그리고 입술끼리 맞닿은 순간에, 츠카사가 호흡을 불어넣자,
아주 느리게, 서서히 달궈지는 금속처럼,
레오가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그는 생동감 하나 없이, 줄이 끊긴 인형처럼 멍하니 츠카사를 봅니다.
생명이라면 무릇 지녀야 할 어떤 불씨가 꺼져 버린 무존재 같습니다.
저리도록 반가워야 할 재회를 당혹이 가립니다.
츠카사가 무슨 말을 걸어도 레오는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더라도 무정물을 관찰하듯 흘려 지나갑니다.
넋이 없는 눈만을 몇 번 깜빡일 뿐입니다.
그리고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와 섭니다.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느리게 걸어 휴게실을 나가려 합니다.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걷는 레오는 아주 천천히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우주선 구조를 따라 나아갑니다.
어떡하죠? 일단 뭘 하는지 두고 볼까요?

레오는 느린 걸음으로 여가 공간을 향해 들어섭니다.
따라갈까요?

여가 공간에 들어선 레오는 잠시 멈추어 멍하니 안을 살핍니다.
어디 한 군데를 명확히 바라본다기보단 그냥 고개가 돌아가니 시선도 돌아간다는 느낌입니다.
한편 츠카사는 내부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우주선이야 당연히 원래 무중력 공간이니 물건들이 둥둥 떠다니는 게 정상인데,
벽에 올려 둔 물건들이 평소처럼 떠다니지 않습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보이지 않는 집게 같은 것이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듯이 그 자리에 고정되어 멈춘 채입니다.
내부를 구성하는 가구나 기계들도 기묘하게 색이 다릅니다.
난감하게 환상적인 공간입니다.
눈에 띄는 물건으로는 창문, 책장, 스크린, 화이트보드, 수납함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너른 창문입니다.
아름다운 우주가 보입니다. 바깥이 희붐하게 밝아옵니다.
동이 트는 시점의 낙조처럼 저편에서 흰 불빛이 번쩍였다 사라집니다.
높은 고도에서 박살 나 부서지는 유리알과 같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짧은 찰나로만 서쪽을 불사르고 꺼진 그 불빛은
인간이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할 천문학적 규모의 폭발로 보입니다.

츠카사가 책장을 향하던 그 때, 츠카사보다 먼저 레오가 앞서 책장에 다가갑니다.
유령처럼 걷던 그는 원래대로라면 승무원들이 취미 용품을 넣어 두던 책장 앞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츠카사가 알던 물건들이 하나도 없는 빈 책장 한가운데에 책만이 한 권 꽂혀 있었습니다.
레오가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려 하지만 그의 손은 책을 그대로 통과합니다.
벽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츠카사는 레오 대신 그 책을 꺼내듭니다.
그런데 이 책… 어딘가 익숙한데요.
표지에는 <세계야담집>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분명 본 기억이 있는 책 아닌가요?
자료조사 판정

기준치: | 60/30/12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책은 이상하게도 앞뒤가 텅 비었고,
츠카사가 예전에 서점에서 읽어 보았던 <녹색 눈의 남자> 챕터만 채워진 채입니다.
흐름은 대강 기억하던 것과 같은데,
명확한 문장이 쓰여 있다기보단 츠카사의 얼버무린 기억을 받아적은 듯이 흐리멍텅한 내용입니다.






레오가 책에 손을 올리자, 아까와는 달리 레오의 손에도 책이 만져집니다!
이제는 레오에게 책을 건네도 그의 손으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제 손으로 책을 쥔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레오는 순간 깊게 숨을 토해냈습니다.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면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은 그대로지만, 시선 역시 츠카사에게 고정됩니다.



여기에 들어오신 이유는... 그 책 때문이었을까요? 앗,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혼잣말이에요. 언제부턴가 혼잣말이 늘어서.......
음... (왠지 모를 머쓱함에 괜히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레오는 손을 들어 조종실 쪽 방향을 가리킵니다.

지나치게 가늘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입니다.



문 쪽을 향한 레오는 다시 두 발짝쯤 앞서 걷습니다.
이번에는 연구소입니다.
이곳 내부도 마찬가지로 츠카사가 알던 것과는 모양이 묘하게 다르네요.
벽면 시계, 선반, 서류함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날로그 시계는 2시 4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잠깐, 여기 있던 시계는 디지털 아니었던가요?

회중시계는 안이 반쯤 부서진 그대로입니다. 회중시계의 시간을 분명히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저 시계의 시간과는 달라 보입니다.

각종 시약, 우주에서 연구, 실험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플라스크를 두는 곳인데,
지금은 텅 비었네요.

원래 연구기록 등을 적어 넣던 서류함입니다.
지금은 텅 비었네요.
아니, 자세히 보니 뭔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냅니다.
소리를 듣자마자 레오가 고개를 듭니다.
이번엔 또 뭘까요?

안을 살펴보면, 깔끔하게 돌돌 말린 채 진홍빛 리본으로 묶여 있는 악보가 들어 있습니다.



츠카사가 악보를 건네 주자,
손끝에 닿은 체온이 아주 살짝 따뜻해진 것 같다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레오가 그것을 쥐면,
불이 꺼진 듯이 냉막하던 눈동자 너머에 비로소 ‘이 사람이 살아 있구나’ 싶은 생기가 약간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약간의 의식을 차린 레오는 처음으로 츠카사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명확한 사고를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네, 스오우 츠카사입니다. (그럼에도 기분은 좋아져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주변이 그다지 춥지 않은데도 몹시 추워하며 츠카사의 품에 파고듭니다.

스오우 츠카사:엣, 이, 이러시면 잘 움직일 수가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신을 끌어안고 작게 토닥였다.



레오는 기운 없이 조종석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화물실을 지나야 하네요.

화물실로 들어섰습니다.
식품 보관장, 응급함, 선반, 벽장 등이 눈에 띕니다.
이곳 역시 앞선 장소와 마찬가지로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 츠카사가 좋아하는 막과자가 놓여 있습니다…….
먹어도 좋습니다.

막과자는 달달하고 맛있네요.
응급약품을 보관하는 상자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반 위에는 푸른 장미꽃 한 송이가 보입니다.
생화 같아 보이는데, 마르거나 상한 곳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미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라는 것 외에는 큰 특이점은 없어 보이네요.
츠카사가 들어 레오에게 건네줄 수 있습니다.

레오가 그것을 쥔 순간,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엔 이제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왔습니다.
전보다도 명료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그러더니... 어떻게 레오 씨가 일어나셔서... 아무튼, 내부를 같이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으음... 계속 춥다고 하셨는데. 이제 괜찮으신가요?

내가 춥다고 했었구나.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 무의식이었을 테니까. 이젠 괜찮아. (네가 잘 아는 평소의 자신처럼, 눈을 접으며 웃어보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맞아요. 시계의 태엽을 감았는데 왜인지 정신을 잃어서... 깨어나 보니 저밖에 없었어요. 조종실에 가보니 어떤 빛덩어리가 안으로 들어왔고,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었고... 그 빛덩어리를 따라가니 레오 씨가 침대에 누워 계셨어요. 레오 씨는 뭔가 알고 계신 게 없나요?



모르겠을 때는 정리다 정리! 어디 보자... (공중을 떠다니는 다양한 물건들을 슥 둘러보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스오, 네가 생각하기엔 여기가 어디로 보여? 평범한 우주선은, 아닌 것 같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오의 말대로라면 여긴 스오가 있던 원래 세계의 정상적인 우주선은 아닐 거야. 지금 여기에 떠도는 물건 중 절반 정도는, 지금의 스오 네가 알지 못할 우리들의 전생의 물건이거든.
그리고, 네가 들었다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 기억나? 내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 신이 있다고 했던 거. 그 시계는 그 신께서 주신 거야. 그러니까~, 태엽을 감고 나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건, 스오도 그 신을 만나고 온 거겠지.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겠어?


내가 처음 미래에서 과거로 올 떄에도, 이런 공간을 지나왔거든.


엣, 혹시 이 앞에 있는 게 조종실이야? 뭔가, 지금도 맨 앞까지 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남아있는데... (제 손을 느리게 쥐었다 펴 보이다, 이내 너를 본다.) 어쨌든, 널 다시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스오. ...다행이야.

조금 전의 일들을 레오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쩐지 조금 억울합니다만... 아니에요, 다행이라고 하죠. (눈앞에 당신이 있다는 게 꿈만 같다는 말을 해버렸으니까! 달아오르려는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만나야 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고, 레오 씨가 그러셨잖아요. 그것뿐이에요.
조종실... 가볼까요?

...응. 가 보자. 이 곳을 나가면 되는 거야?

네에, 나가서 앞으로 쭉 가면 조종실이에요.


화물실에서 이어지는 구역은 다음 구역은 원래 조종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목격한 공간은 전혀 딴판인 장소였습니다.
마치 전시실 같은 풍경입니다.
깨끗하고 넓은 홀 안에 밝은 조명과 유리 진열장이 가득합니다.
레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러더니, 무언가 퍼뜩 떠오른 듯이 츠카사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맞은편 유리벽으로 걸어갔습니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채운 유리 너머에 무엇인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레오의 시선이 그곳으로 고정됩니다.
먹먹한 침묵에 사로잡힌 그는 잡은 손을 놓고 유리 위로 쓰다듬듯이 선을 그려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받아 보았던 츠카사의 초상화입니다.
츠카사가 기억하고 또 잘 관리해 왔을 것과 달리 누렇게 변색되고,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잘 압축하여 보존한 형태입니다.
아마도 이건… 레오가 가장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겼던 미래의 그림이겠지요.



그때는... 놀랐었죠. 하지만 이제 이유를 아니까. (쓰게 웃었다.)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정말 정말 모르겠지만... 감사해요, 레오 씨. 진심이에요. (당신의 팔을 살짝 잡았다 놓으며 얘기했다.)

...사실은 말이야, 아무래도 좋았어. 어떤 전생의 너를 만났는지, 수많은 전생의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번의 시간을 반복했는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어. 이 길의 앞에선 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알고 있다면... 그러니까, 스오. 나는 괜찮아. 내가 만나고 싶었던 너는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고맙다는 말도, 내가 할 말이야. 넌 그저 평범하게 이번 생을 살 수도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미래의 사람인 나와 얽히고, 말도 안 되는 내 이야기를 들어줬잖아. 너는 내가 가진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나도 고마워. 스오. (살풋 접히며 미소짓는 눈이 투명하게 일렁인다.)

저는 레오 씨를 이해하고 싶어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제가 우주 비행사가 된 것도 시간여행이라는 분야에 접근하고 싶어서였는걸요? 지극히 짧은 시간을 함께했던 레오 씨 때문에...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된 거라고. 울지 말아요, 레오 씨.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반대편에 문이 있네. 가자.

문을 열 때, 츠카사의 발에 뭔가 차입니다.
쨍! 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그것은 얼핏 보기에 와인 같습니다.
하지만 병이 투명하고, 안에 든 액체는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레오가 그것을 알아봅니다.



시간여행을 하거나, 우주로 나가거나… 아는 물건이지. 왜냐하면 나도 처음 올 때 이걸 마셨거든.



두 사람은 감로주 병을 챙깁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 다음 장소로 건너갑니다.
문을 열면, 그제야 목적했던 조종석이 보입니다.
멀리 너른 우주가 펼쳐진 망망대해입니다.
내부는 알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바닥이 조금 이상하네요.
평범한 타일 바닥이 아닙니다.
옻빛 나무 재질인데,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포장을 반쯤 뜯은 시계 같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운데쯤에 작은 톱니 두 개가 맞물려 서로 돌아가지 않고 탁탁 튀는 소리를 냅니다.
그 아래에 무언가를 끼워넣을 수 있는 홈이 하나, 홈 바로 옆에 시곗바늘을 돌리는 태엽이 있습니다.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니, 저 홈은 츠카사가 가지고 있는 회중시계와 딱 맞는 크기일 것 같습니다.


우음, 홈은 그렇게 하면 되겠는데. 이 태엽은 어떡할까, 시곗바늘을 돌릴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까... 아까, 어디였더라. 분명 디지털 시계가 아날로그 시계로 바뀌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억을 더듬어 2시 4분이 되도록 태엽을 돌려본다.)

홈에 시계를 끼워 넣고 태엽을 돌려 시간을 맞추면,
달칵 소리와 함께 멈췄던 톱니바퀴들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조종석 계기판에 있는 조종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종석 계기판의 레이더나 모니터 등 모든 전기 신호가 끊겼지만,
조종간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납니다.
조종간은 바로 당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우리 우주 비행사님께 기습 질문! 우주선을 움직이기 전에는 뭘 정해야 하지?


(방금 네가 끼운 회중시계를 돌아보고는) 저 회중시계를 사용했으니까, 아마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가 줄 거야. 저 시계에는 그런 힘이 있거든.
나는 여행자지만, 넌 비행사라면서? 그러면 조종도 네가 하는 거지. 어디로 가고 싶어, 스오? 어떤 곳으로 가고 싶어?
네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줘, 그게 어떤 것이라도 난 따를 테니까.
...다만, 스오가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네. 만약 우리가 이대로 지구로 돌아간다고 하면 나는 아마, 스오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아가게 될 거야.


다행히 나는, 그 직전에 스오한테 회중시계를 준 덕분에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한 번 사라졌다가 신의 뜻으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난 이미 지구의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존재가 된 거야. 이건 아무리 나라도 지금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저 회중시계의 힘이 있다면, 내 운명마저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을지 몰라. 그것도 앞으로 우리가 갈 곳에 대한 미래에 포함되니까.
스오는, 어떻게 하고 싶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레오 씨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지구로 돌아가서, 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레오 씨는 어떨 것 같으신가요?



츠키나가 레오:(평범한 사람들처럼. 아주 오래 전, 미래를 살아가던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삶의 모습일 터였다. 평범하게 행복한 삶. 이제 마침내 단 한번의 삶을 너와 함께 살아낼 수 있다면.) 네가 옆에 있는 삶이라면, 나는 뭐든 좋아. 다음 생이 없다는 감각은 이제 조금 생소해져 버렸지만, 뭐 어때~. 스오가 바라는 건 그거야?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그렇게 결정하는 거잖아요. 대답... 충분히 되었을까요?



처음에 츠카사가 보았던, 푸르게 맥동하는 빛이 납니다.
츠카사는 조종간을 당길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항법 판정

기준치: | 60/30/12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두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기판 앞에 섭니다.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던 테미스 3호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별빛이 선체 뒤로 흐릅니다
3차원도 4차원도 아닌 듯한 어떤 날들을 건너, 찬란한 행성의 바다를 타고 넘어…….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아득한 정신을 차려 보니 테미스 3호는 기이한 공간에 멈춰 섭니다.
사라졌던 빛 덩어리가 나타나 두 사람 앞에서 팔딱팔딱 뛰고 있습니다.
잠시 흔들거리던 그것은 조종석 쪽의 기압실 문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저길 열고 나가면… 바깥인데요?


하지만 두 사람은 묘한 확신 속에서 감로주를 나눠 마십니다.
빛이 우리를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분입니다.
금빛 액체를 마시면 몸속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술이라기보단 달을 삼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가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유백색 허공으로 나아갑니다.
딱딱하지도 흐르지도 않는 기이한 감촉의 바닥이 밟힙니다.
빛과 색의 삼원색을 백만 번 겹쳐 쌓고 온갖 조명과 필름을 다 가져와도 지금 이 광경은 묘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뜨거운 항성의 명멸이 감미롭게 뺨에 내려앉고,
기계 장치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잘 짜인 커튼의 모양으로 머리칼을 드리웁니다.
조용한 진동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과 발 사이 부드럽게 엉기는 무중력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보석처럼 맺혔다 흘러 떨어지는 위성들, 멀리 반짝이는 은하,
분명 공기조차 없을 우주 저편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과 축복처럼 관능적인 여름밤의 열기.
오렌지처럼 상큼한 순간들이 꿈결로 모여 공간으로 화한 듯이.
두 사람이 그리워하는 시절을 모두 담은 듯이…….
이곳은 어딜까, 하고 주변을 둘러볼 때,
문득 시선이 닿는 곳에 유리나 거울, 혹은 물체가 잘 비치는 수면,
이것도 아니라면 액정 스크린 같은 것이 끝없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는 점을 알아차립니다.
깨닫고 보니 두 사람은 한 방향으로 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길 오른편으로 스크린이 지평선 너머까지 쭉 이어진 것인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어떤 액정처럼 화면 안에는 여러 풍경이 있습니다.
따라 걸어가면서 관찰해 보면 놀랍게도 몇몇 스크린에는 츠카사의 유년 시절도 담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츠카사, 교복 차림인 츠카사, 아주 어린 아기인 츠카사,
혹은 츠카사가 모르는 과거의 옷을 입은 레오도 움직입니다.
머리가 짧거나, 길거나, 아주 예전 사람처럼 오래된 복식을 입었거나,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하거나…….


츠카사의 손도 마찬가지로, 딱딱할 것만 같았던 스크린의 저편을 부드럽게 통과합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 하며 우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무수한 스크린 사이에서 츠카사는 문득 아주 눈에 익은 광경을 발견합니다.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는 소소한 점을 제외하면 다른 날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입니다.
그날도 츠카사는 평소처럼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교실로 들어서니 뭔가 이상한 게 보입니다.
원래 자리 배정상 츠카사의 옆자리는 비어 있는데, 난데없이 책상 하나가 생긴 게 아닌가요?
게다가 누군가 앉아 있습니다.
의아한 기색이 된, 교복을 입은 츠카사가 자리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레오 역시 츠카사의 시선을 좇아 화면을 보고 놀람 섞인 웃음을 터뜨립니다.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혹시 기억하나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창문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로 사건이 생길 타이밍인데요?
그 순간, 레오가 얼빠진 감탄사를 흘립니다.


그러고선 영문을 모르는 츠카사의 손을 꽉 잡은 채 스크린 너머로 손을 뻗는 것이 아닌가요?
강하게 맞물려 잡은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퍼집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맥박이 두근두근 흐릅니다.
손끝에 혈관이 지난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깨달을 줄이야.
두 사람의 손은 매끄럽게 화면을 통과합니다.
물의 장막 같은 것을 지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레오는 츠카사의 손을 잡은 채 이리저리 더듬고 이끌어 봅니다.
그러다 작고 판판한 유리 같은 것이 손끝에 잡혔을 때…
그것을 힘주어 밀쳤습니다.
이윽고 화면 안에서…….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위쪽 창문이 츠카사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안 돼, 스오.
144번째는 안 돼.
경악 어린 깨달음이 츠카사의 몸을 내달립니다.
레오는 대단한 것을 이제야 안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니었거든.
그날 너희 반엔 정말로 새로 전학 오기로 했었던 학생이 하나 있었어.
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네 대략적인 위치 정도만 파악했을 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찾지 못해서 굉장히 초조했는데…
학교를 마구 뒤지기로 작정하고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유리창이 갑자기 떨어지잖아.
그래서 그 아래에서 너를 발견해서… 달려가 구해냈지. 그리고 약간의 능력을 발휘해서, 원래 네 옆에 앉을 예정이었던 학생 자리에 내가 들어간 거야.

그래, 우리가 지금 내게 '네 위치' 를 알려 주었어!

원래 오기로 했던 전학생은 어떻게 된 건데요?!

전학생은 걱정 마! 그 아이는 스오의 학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의 전학생이 되어서 들어갔을 테니까.
레오는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츠카사를 바라봅니다.
일설로 다 형용하지 못할 감정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건 추상적인 설명이고,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고차원 공간 같은 거 있잖아. 시간축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는 6차원 우주… 뭐 그런 거.
그리고 그는 찬란한 시선을 들어 지평선 너머 환히 움트는 여명을 바라봅니다.

아까 약속한 대로… 같이 마저 산책할래? 츠카사.




그때에, 츠카사가 맨 처음 들었던 바로 그 통렬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하나의 질문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안에서, 세상의 밖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그것이 너의 대답이냐?
놀란 얼굴을 든 레오는, 이내 웃으면서 츠카사의 팔을 굳게 잡은 채 심호흡을 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리고 츠카사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걷기를 재촉합니다.
우리는 절망으로 태어나 얼음에 파묻혀 죽더라도 세상에 이토록 색채가 많은 까닭을 알아서,
증거도 해설도 필요치 아니한 사랑, 시간은 속일 수 없고.
그밖의 아무 소용 없는 나약한 것들은 전부 멎은 우주를
두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횡포처럼 당신을 아낀다던 레오.
질식할 것 같은 애정, 익사 당할 듯한 사랑.
그의 이름을 발음하면 종종 침몰하는 듯한 기분에 뛰어들곤 했습니다.
불시착한 우주먼지처럼 이 시간여행자의 말도 안 되는 애정에 휩쓸려 다녔죠.
흠뻑 빠져 죽었는데도 도로 젖는 기분.
그러나 이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얽혀,
본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처럼 하나의 모양을 구성한 시간의 흐름이 여기 있었습니다.
삶의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고
그 가운데 돌출될 만한 사건은 찾을 수 없으며
남은 시간을 채우는 방법이라고는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게 전부인데
절벽 끝에서 삭풍으로 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 때라도
가자, 지평선 너머로.
설탕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타고 가자.
어둠 다음의 어두움으로, 혹성 저편의 성운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END 0 : 라디오 전파는 끝없이 우주를 돈다
이 시나리오에는 정해진 엔딩이 없습니다.
어떤 약속을 선택하였든 그것은 레오와 츠카사의 몫입니다.
시나리오에서 제시하는 것은 몇천 년간 자신에게 봉사한 레오를 위해,
제자노스가 준비한 선물인 ‘어디로든 향하는 길’까지입니다.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여러분의 뜻에 달렸습니다.